나는 원래 의지가 강한 편이었다. 한참을 누워있다가도 속으로 '지금부터 셋 세면 일어난다. 하나, 둘 셋!'하면 바로 일어나서 해야 할 것들을 착착 하는 타입이었고 그 상태로 유학을 나가 항상 의욕적으로 생활했다.
첫 유학생활에 큰 도움을 준 분은 바그네리안 베이스 줄리안 로데스쿠 선생님이었다. 만혼을 하셔서 아이가 없어 베트남계 양자를 들인 까닭에 동양권 학생들을 잘 아껴주시는 분이었는데 두번째 학기에 내가 난생 처음 오페라 주인공을 맡게 되자 피드백을 주기 위해 밤늦게까지 이어진 리허설을 다 지켜보고 나에게 조언을 해 주시기도 했다. 나는 이 분을 미국 생활 중 아버지처럼 여기고 따랐다. 세번째 학기 오페라 마술피리에서도 모노스타토스와 타미노 커버로 캐스팅되자 선생님은 자신도 데뷔를 마술피리로 했다며 매우 기뻐하셨고 이번 학기에는 무엇무엇을 더 해보자며 서로가 의욕을 불태웠다.
그리고 몇 주 후, 선생님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장례식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고, 고인의 생전을 추모하는 작은 음악회와 근처 커티스 음악원의 한 층을 빌려 생전 모습을 전시하고 지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도 열렸다. 나는 음악회에서 노래를 할 기력이 없어 그저 지켜만 보았다. 얼떨떨한 채로 장례식에서 돌아온 이후로도 학교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략 3주를 멍하니 보냈다. 오페라 프로덕션은 내가 오페라에 복귀하지 못할 것으로 여겨 반쯤 포기했다. 그러다가 학과장 교수님이 불러서 "남은 사람은 한 발짝 다시 내딛어야 할 때다"라며 새로운 지도교수를 배정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면 선생님께도 누가 될 것 같아 이를 악물고 다시 학교수업에 복귀했다. 매일 무너질 것 같은 가운데 수업을 이어나가고 오페라도 열심히 했다. 디렉터는 "새 악당이 생겼다"며 내 모노스타토스 연기를 칭찬했다. 오페라는 돌아가신 선생님께 헌정하는 연주로 결정되어 제자들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기뻐했다. 모두가 열심히 한 덕분에 원래는없는 커버 배역들을 위한 연주도 따로 잡혔다.
그러나 나는 우울증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후 평점은 곤두박질했고 의욕은 사라졌다. 전처럼 잠에서 깨어 '셋 세면 일어난다. 하나, 둘, 셋!'을 해도 몸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싱크대에 설거지거리는 산처럼 쌓여가고 살아있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새로 지정된 지도교수님은 친절하고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몰아붙이는 타입이어서 어떻게든 학업을 마치도록 등을 떠밀어주었다. 그렇게 석사공부를 마치고 1년간 미국에서 머물 수 있는 OPT(Optional Practical Training)를 신청해 바로 박사준비를 했지만, 상태가 더욱 나빠졌다. 심할 때는 해가 뜨는 것을 보고도 그대로 멍하니 해가 떨어질 때 까지 바라보다 하루를 보낸 적도 있었다.
돌아가신 선생님을 비롯해 가족들,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공부를 하고 레슨을 받고 박사 입시를 준비했으나 쉽지 않았다. 숨쉬는 것조차 귀찮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OPT기간동안 입시는 실패로 돌아갔고, 한국에 돌아와 병원을 찾았다. 두어 종류의 약을 처방받고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 조금 나아진 듯 싶었지만 예전만큼의 퍼포먼스가 나지는 않았다.
이듬해 두 군데 학교에서 박사과정을 합격해 드디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이 상태로 공부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캔자스대학교는 전교생이 3만8천명 정도 되는 큰 학교여서 의무실 수준이 아니라 병원 같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고, 담당 의사를 통해 진단과 항우울제 처방을 받을 수 있었다. 학교 분위기도 친절하고 서로를 도우려는 좋은 환경이었기에 나는 유학 초기만큼은 아니어도 어느정도의 퍼포먼스를 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왔다.
2020년 봄방학이 시작한 이후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칩거하면서 받아온 약도 떨어지고 사람도 못 만나니 떨쳐낸 줄 알았던 우울증이 또 심각한 수준으로 돌아갔다. 다시 집안은 난장판이 되었고 건강도 나빠졌다. 간신히 줌을 통해 의사와 화상통화로 처방을 받고 약을 타 먹으면서 논문을 썼는데, 줌으로 첨삭해주시던 라우스트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도 프랑스에서 유학하면서 논문을 써 보니 외국 유학생이 논문 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통감한다. 나는 그나마 언어가 비슷하고 알파벳을 사용하는 나라를 다녀왔는데 너는 완전히 다른 언어로 쓰니 얼마나 힘들겠니. 내가 매주 얼마나 써야 할 지 정해주고 문법 틀리는 것은 고쳐줄 테니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말고 열심히 써 봐."
교수님 덕분에 나는 꾸역꾸역 논문을 쓰고 디펜스를 마칠 수 있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진료를 받으니 Residual symtom이라며 이미 문제가 된 상황은 지나갔지만 아직 몸에 증상이 남아있으니 조금만 약을 더 먹으면 될 거라고 해서 6개월 정도 약을 더 먹었고 현재는 문제없이 생활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필요할 때 필요한 사람을 만나는 복이 있었다. 그 덕분에 바닥에서도 올라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혼자서 견디면 힘든 순간들이기에 우울증을 겪는 사람을 만나면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나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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