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들을 읽는 여러분은 악마가 거짓말쟁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C.S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첫페이지에 적힌 말입니다.
C.S.루이스가 친구 J.R.R 톨킨에게 바치는 책이지요.
(다음 페이지에 「J.R.R 톨킨에게」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조카 웜우드에게 보내는 31통의 편지 중 17번째 편지를 소개합니다.
사랑하는 웜우드에게
지난번 편지에서 탐식을 인간의 영혼을 낚는 수단으로 탐탁치 않게 여겼던데, 그건 오로지 네가 무식한 탓이야. 지난 일백년간 우리가 이룬 가장 위대한 성과는 바로 이 주제에 관해 인간의 양심을 완전히 마비시켰다는 거라구. 이제는 유럽 전체를 위아래로 아무리 훑어보아도 탐식에 관해 설교한다거나 탐식 때문에 가책을 느끼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지. 이게 다, 많이 먹는 데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맛있는 걸 찾아먹는 데 욕심을 부리도록 총력을 집중한 결과다.
환자(각각의 악마들이 맡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의 어머니가 그 좋은 본보기라는 걸 나는 기록을 찾아보고 알았다만, 너도 글루보즈에게 들어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자신이 평생 이런 관능의 노예로 살아왔다는 걸 알면-언젠가 그런 날이 오길 바라마지 않는다- 정말 놀라자빠질걸. 지금은 단지 먹는 양이 적다는 사실 때문에 눈치를 못 패고 있지. 하지만 인간의 위장과 입맛을 이용해서 까탈스럽고 참을성 없고 무자비하고 이기적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양이야 얼마를 먹든 무슨 상관이냐?
글루보즈는 이 노인네를 썩 잘 요리하고 있더구나. 자기를 초대한 여주인들이나 하인들에게 공포 그 자체가 된 걸 보면 말이야. 이 여자는 어떤 요리를 내어놓든 새침하니 살짝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며 "어머나, 됐어요, 됐어요…… 제가 원하는 건 홍차 한 잔 뿐이에요. 엷게 타 주시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너무 연하게는 말고요. 그리고 정말로 바삭바삭한 토스트를 아주아주 조그만 조각으로 하나 곁들여 주시고요"라고 말하지.
이제 알겠느냐? 이 노인네는 자기가 원하는 게 이미 차려진 음식들보다 양도 적고 값도 싸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을 번거롭게 하면서까지 원하는 걸 먹으려는 결심이야말로 탐식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제 입맛을 만족시키고 있는 그 순간에도 스스로 절제를 실천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구. 이 노인네는 손님들이 북적거리는 식당에 가서도 과로에 지친 여종업원이 날라다 준 접시를 보자마자 짤막한 비명을 지른단다. "어머나, 이건 많아도 너무 많군요! 도로 가져가서 반의 반만 담아다 주세요!" 혹시 누가 한마디라도 하면 쓸데없는 음식낭비를 막느라 그런다고 대꾸하겠지. 사실은 우리가 노인네한테 옭아매 놓은 특별한 미식 취향이 어쩌다 원하는 양보다 많이 담긴 음식 때문에 거슬린 탓인데도 말이야.
글루보즈가 수년 간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진행해 온 공작의 진정한 가치는, 이 노인네가 뱃속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생활 전체가 좌지우지된다는 데 있다. 노인네는 지금 '그저 내가 원하는 건' 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법한 심리상태에 있지. 그저 노인네가 바라는 건 잘 우려낸 홍차 한 잔, 제대로 익힌 달걀 하나, 또는 적절하게 구운 빵 한 조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간단한 음식을 '제대로' 해내는 하인이나 친구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제대로'라는 주문 뒤에는 자기가 옛날에 느껴 봤다고 생각하는 그 입맛, 재현이 거의 불가능한 그 입맛을 채우려는 물릴 줄 모르는 욕구가 숨어 있다. 노인네는 그 옛날을 "좋은 하인들을 구할 수 있었던 시절" 이라고 묘사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감각이 지금처럼 까다롭지 않았고 다른 것에서 얻는 쾌락들도 많아서 식탁의 쾌락에 이 정도까지 매달리지 않았던 시절'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지.
이렇게 날마다 실망하다 보면 짜증도 날마다 느는 법이다. 요리사들은 채용하는 족족 그만두었고 우정은 싸늘하게 식어 버였지. 글루보즈는 원수(악마의 시점에서 원수는 Jesus Christ)가 노인네한테 '먹는 데 너무 관심이 많지 않느냐'는 의심을 희미하게라도 넣어 줄 때마다 "난 뭘 먹어도 상관없지만 아들에게는 맛난 음식을 먹이고 싶어"라는 논리로 응수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는 이 노인네의 탐욕이야말로 최근 몇 년간 집안에 끊임없이 불화를 일으킨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지.
환자는 바로 이 엄마의 아들이다. 다른 전선에서도 물론 최선을 다해 똑바로 일해야겠지만, 탐식이라는 영역에 간간이 침투하는 것도 게을리하지는 말아라. 환자는 남자다 보니 '그저 내가 원하는 건'이라는 위장술에 걸려들 가능성이 별로 없다. 하지만 남자들의 경우에는 허영심의 도움을 받아 탐식가로 만드는 길이 있지. 스스로 음식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다고 믿게 하고, 스테이크를 '제대로' 만드는 유일한 식당을 발견했다고 으스대게 만들거라. 처음엔 허영심으로 시작했다 해도 결국에는 습관으로 굳어지는 법이다.
어떻게 접근하든지 간에 중요한 점은, 제가 좋아하는 어떤 것 - 샴페인이든 홍차든 생선요리든 담배든 아무거나 - 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찌증을 부리게' 해야 한다는 거야. 그러면 그의 자비도, 정의도, 순종도 모조리 네 손에 들어올 게다.
단순한 과식은 미식보다야 하수(下手)에 해당하지. 과식의 주된 용도는 순결을 공격할 대포를 준비하는 거야. 다른것과 마찬가지로 순결을 다룰 때도 환자를 거짓된 영성에 잡아 두어야 한다. 의학적인 측면에는 눈도 돌리지 못하게 하거라. 지난 24시간 동안 무엇을 먹고 마셨는지만 살펴봐도 네 탄약의 출처를 알 수 있고 약간의 절제만으로도 네 통신망들을 교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자기가 어떤 점에서 자만하고 믿음이 부족했길래 악마의 손에 걸려들게 되었을까만 생각하게 하라구.
그리고 그가 굳이 순결의 의학적 측면을 생각하려 들거든, 우리가 영국인들에게 심어 준 엄청난 거짓말을 주입해 보거라. 몸을 과도하게 움직여서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순결의 미덕을 지키는 특효라는 거짓말 말이야. 선원들과 군인들의 악명높은 방탕함을 뻔히 보면서도 이런 거짓말을 믿겠느냐고? 우리가 남자 선생들을 이용해서 만들어 낸 그럴싸한 이야기가 있잖느냐. 그치들은 순결을 핑계로 운동경기를 즐기기 위해, 운동경기야말로 순결한 생활을 지키는 데 그만이라고 주장하지. 그러나 이건 편지 말미에 대충 다루기에는 너무 거창한 주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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