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한참 예전에 기사화 된 이야기. 배니티페어와 방송국 웹사이트 등등에 올라온 기사를 번역한 글입니다. 글에 흑백이지판 피투성이인 사진이 있으므로 주의.
2005년 초 겨울 아침, 경찰에게 제보가 날아왔습니다.
마이애미 서쪽 끝 늪지대에서 한 여성이 발견되었습니다. 피떡이 되도록 맞아서 거의 죽기 직전인 상태로 말이죠. 여성을 발견한 사람은 동네 전력회사 직원이었습니다.
다행히 숨이 붙어 있어서 바로 헬기로 병원에 이송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21세의 이 여성은 눈을 뜬 뒤에도 여전히 정신이 혼미해서 모든 것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만 서툰 영어로 자신이 강간당하고 두드려 맞은 뒤 그대로 버려졌다고 말했습니다. 눈밑뼈가 부서지고 뇌손상이 올 정도로 머리를 심하게 맞아서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체내에서검출된 정액은 유전자 조사에 들어갔지만 2005년 당시의 과학력은 샘플을 분석하는 데 수 개월 이상이 걸려서 바로 특정인을 지목할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여성은 외국인이 영어할 때 다들 그렇듯 발음과 문법 모두 엉망이었고 거기에 공포와 혼란이 더해져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이런 와중에도 맨 처음 요청한 것은 이상하게도 변호사를 불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변을 조사하던 경찰은 근처에 파란 담요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여성이 발견된 장소에서 10마일 정도 떨어진 Airport regency 호텔의 것이었고, 호텔 측에서는 이 여성이 자기 호텔에서 머물던 손님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이나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원래 크루즈선에서 일을 했는데 선상에서 손을 심하게 다친 후 회사와 산재 배상 소송을 하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소송 진행과 회복을 위해서 호텔에 머물고 있었던 거죠.
이나의 말에 의하면 4층의 자기 방에서 2~3명의 백인이 자신을 덮친 것 같다고 말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녀가 기억하는 건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베개로 누른 뒤 독한 술 같은 걸 강제로 마시게 한 다음 자신을 어딘가로 옮긴 후 차 뒷좌석에서 폭행을 당하면서 살려달라고 빌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그녀의 변호사는 호텔이 손님의 세이프티를 확보하지 못하고 납치당하게 둔 보안상의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소송을 걸었습니다. 너무 빠른 변호사의 움직임 때문에 호텔은 이 손님이 사실은 전문적인 보험사기꾼 같은 게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경찰은 객실을 면밀히 조사하는 한편 호텔 직원 전체와 174개 방에 있던 투숙객 리스트, 호텔에 설치된 CCTV 카메라의 내용까지 모두 조사했지만 이렇다할 단서를 찾지 못했습니다.
호텔은 투숙객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객실에 카메라를 설치하지는 않았지만 1층에는 16개나 되는 카메라가 있어서 호텔 로비, 엘리베이터, 출입구를 전부 확인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사건이 벌어진 날 이나가 호텔에 들어오는 영상은 있었지만 나가는 영상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창문으로 뛰어내리기엔 4층은 꽤 높고 그런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럼 이나는 어떻게 10마일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걸까요?
이 사건을 지휘하고 있던 마이애미 경찰의 푸트 형사는 언짢았습니다. 사건이 지지부진하자 호텔 측에서 사설 탐정을 데려왔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설 탐정이 사건 현장을 기웃거린다는 것은 경찰로써는 짜증이 올라오는 일이니까요. 그렇다고 호텔 측은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평소처럼 잘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고소를 당했으니 억울할 수 밖에요. 그래서 호텔은 자신을 변호할 로펌을 선임했고 로펌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제대로 알아내기 위해 켄 브레넌이라는 사설 탐정을 고용했습니다. 이 양반이 전체 스토리의 주인공입니다.
켄 브레넌은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금목걸이를 두른 풍채 좋은 중년이었습니다. 롱 아일랜드 지역에서 경찰 생활을 하다가 마약단속국 요원으로 8년을 일했고, 90년대 중반에 상품 중개인 일을 좀 하다가 사설 탐정으로 활동중인 사람이었죠. 애들은 다 컸고 부인은 이혼 후 지금은 사망한지라 한 사건에 집요하게 매달리기 좋은 가정 환경(?)도 로펌의 눈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브레넌은 지루한 업무나 같잖은 사기극보다는 이번 사건처럼 미궁에 빠져서 누군가가 확실한 단서를 찾아내야 하는 어려운 사건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활기차고 느긋한 성격이었지만 자신이 세운 원칙에는 엄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의뢰인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 하지만 의뢰주를 돕기 위해서 찾아낸 사실을 숨기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저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낼 뿐입니다."
자신이 찾아낸 정보가 고객에게 도움이 되는 건 좋지만 브레넌에게 있어서 그것은 1순위가 아니었습니다. 법정에서 승소하는 것이 아니라 미스테리를 파헤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요.
해야 할 일은 분명했습니다. 누가 이 여성을 강간하고 폭행한 뒤 늪지대 풀숲에 버렸는지 찾아내는 일. 여러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납니다. 습격이 호텔에서 일어났는지,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호텔을 빠져나갔다가 사건 현장에서 범인을 만난 것인지, 혹은 다른데서 공격당한 것인지도 불분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저 단순한 피해자인지, 아니면 모국의 더 큰 범죄조직에 연루된 것은 아닌지, 성폭행인지 매춘인지, 또 다른 무언가에 연루된 것은 아닌지 등등...질문 중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매우 적었습니다.
그는 푸트 형사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나이 또래도 비슷하고 브레넌 또한 경찰에 몸담은 경력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는 그럭저럭 통하는 편이었지만 푸트 형사의 결론은 차가웠습니다.
"씨부럴 이봐, 당신이나 나나 잘 알잖소. 여기서 당신이 수사해서 뭐가 더 나오겠냐구."
"수사를 이래라저래라는 안 할 거고 무슨 짓을 하든 다 보고한 후에 하겠습니다. 만약에 내가 범인이 누군지 알아내도 체포는 당신이 하는 겁니다. 형사양반 엿먹일 짓은 안할 테니까 걱정 마시고."
이미 이잡듯이 다 털어낸 후라 더 이상의 증거가 나올리 없었지만 푸트 형사는 그의 논리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사설탐정과는 좀처럼 나누지 않는 경찰 자료를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사건 현장 사진과 감시 카메라 화상의 기록, 그리고 혼돈 그 자체인 피해자 사정 청취 기록까지. 푸트형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했기에, 켄 브레넌에게 무운을 빌어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보험사에서 나온 조사원이 작성한 기록 또한 별 다른 내용이 없었습니다. 이 여성의 기억은 여전히 헝클어진 채여서 처음엔 한 명에게 공격당했다고 했다가, 셋이었다가, 마지막엔 둘이라고 답했습니다. 범인의 억양 또한 처음엔 히스패닉계라고 했다가 루마니아계인 같기도 하다고 말을 바꾸는 등, 제대로 된 증거라고 볼 수 없었습니다.
호텔의 경비 시스템은 엄중했습니다. 호텔 부지를 펜스가 둘러쌌고 출입구는 적었습니다. 후문은 원격으로 조작이 가능하지만 항상 감시카메라와 경비가 지키고 있었고 모든 출입구의 앞뒤, 호텔 정문, 로비, 엘리베이터, 수영장, 주차장 모두 감시카메라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객실의 카드키는 로그가 저장되어 언제 문을 열고 닫았는지 기록이 남기 때문에 어떤 손님이 방을 들어오고 나갔는지 동선을 추적하는 것도 비교적 쉬웠습니다.
브레넌은 좋은 수사관이 다들 하듯 무엇을 확실히 알고 있는지 분명히 하는 것 부터 시작했습니다. 확실한 정보는 사건 당일 오전 3시 41분 피해자가 자기 객실이 있는 4층으로 올라가 카드키로 문을 열었다는 것과 동이 틀 무렵 반죽음이 된 채로 멀리 떨어진 늪지대 풀숲가에서 발견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약 3~4시간 사이에 모든 사건이 벌어졌다는 얘긴데, 피해자가 바깥으로 나간 모습을 잡은 카메라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카메라에 잡힌 피해자의 사건 전 모습은 어깨 길이 금발에 붉은 자켓으로 눈에 잘 띄었습니다. 몇달째 호텔에 머무르다 보니 지겨웠는지 그녀는 자주 로비로 내려와 호텔 직원이나 손님들과 잡담을 하거나 담배를 피우러 건물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피해자는 그 날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가 자정쯤 되어 돌아온 뒤 오전 3시에 밖에 또 밖으로 나갔는데, 본인 말로는 우크라이나에 계신 어머니와 통화를 하기 위해 근처 편의점에 국제전화 카드를 사러 나갔다고 합니다. 얼마 후 다시 호텔로 돌아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뒤에 서 있던 거구의 흑인 남성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엘리베이터 앞 카메라에 담겨 있던 피해자의 마지막 기록이었습니다.
피해자는 자신이 다른 데 가지 않고 4층에 올라가자마자 바로 문 열고 들어갔다고 증언을 했는데 호텔 컴퓨터의 객실 출입문 기록에 의하면 약 20분이 지나서야 객실 문이 열렸다고 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미심쩍은 의문이 남았지만 알고보니 엘리베이터 카메라 시간이 20분 늦었던 것이라 다행히 피해자가 누명을 쓰는 일은 없었습니다. 어쨌든, 이 이상의 화상 기록은 없었습니다.
모든 카메라는 모션 센서가 달려 있어서 움직이는 물체를 감지하면 움직이는 식으로 운용되었으나 고장이 난 적은 없었습니다. 혹시나 싶어 경찰은 여러 각도에서 움직여 보기도 하고 최대한 느리게 움직여서 모션 센서가 감지를 못하게 하는 방법은 없었는지 실험해 봤지만 아무리 느리게 움직여도 카메라는 착실하게 모든 사물을 잘 잡아내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럼 적어도 호텔 카메라의 감시를 요리조리 피해서 나간 것은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4층 창문을 통해서 나가기 위해선 누군가가 이미 기절한 피해자를 밑에서 받아줘야 하고 그 다음 호텔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창문 아래는 낮은 관목이 있어서 바닥에 던지거나 로프를 내렸거나 사람 정도 무게에 의해 눌렸거나 하면 흔적이 남아야 했습니다. 피해자의 몸에도 끈에 묶였거나 높은 곳에서 딸어진 흔적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었습니다. 여러명이 합심해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세심하게 처리를 했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브레넌은 강간하려고 팀을 짜서 여자를 습격해 기절시킨 다음 4층에서 매달아내리는 폭력적인 성범죄자 집단이라는 건 무슨 미친 마술쇼 공연팀이 단체로 돌아서 저지른 게 아닌 이상 다른 현저히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습니다(제 생각에도 저런 수고를 했으면 납치해서 돈을 뜯어낸다거나 할 것 같네요).
그러므로 브레넌의 결론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가 정문으로 나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험사 조사원의 기록 또한 "어떻게 이 여성이 호텔 밖으로 나갔는지가 수수께끼다"라며 정리되어 있었죠. 좀처럼 깨기 힘든 수수께끼였습니다.
브레넌은 메모장에 한 단어를 끄적였습니다.
"위장?"
그는 악착같이 모든 방문객의 감시카메라 기록을 뒤졌습니다. 손님이 들어와서 정문 카메라에 잡힌 뒤 로비 카메라에, 이어서 엘리베이터 카메라, 그리고 객실 카드키가 열리고 닫히는 기록을 모두 연결하고 반대로 나갈때는 문, 엘리베이터, 로비, 정문으로 나간 후 주차장에 있는 차가 나가고 들어오는 것 까지...개인손님과 단체손님을 막론하고 모든 기록을 샅샅이 살펴보면서 용의자가 아닌 사람을 리스트에서 하나씩 줄여 나갔습니다. 누군가가 피해자가 들어오기 전에 자기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용의선상에서 제외했습니다. 누군가가 사건 시간대 전에 호텔을 나가서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까지 들어오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로 제외했고, 마지막으로 의심스러운 시간대에 나간 사람들 중 아주 작은 가방이나 가방 없이 나가는 사람을 조심스럽게 제외했습니다.
경찰은 혹시나 피해자가 매춘을 했고(마이애미는 매춘이 합법입니다) 그 과정에서 폭행을 당한 건 아닐까 생각하기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이미 소송 때문에 호텔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 또 호텔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모습은 경찰과 호텔 양쪽에서 피해자를 반대로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브레넌은 길고 지루한 작업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는 화면 프레임 하나 하나를 뒤져보며 이상하거나 변덕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는지도 꼼꼼하게 살펴본 결과, 딱 한 명의 용의자가 남았습니다. 마침내 최종적으로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바로 3시 41분에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던 남자였습니다. 이 남성은 안경을 쓴 흑인으로 키는 최소 190센티미터 이상에 몸무게는 135킬로그램 이상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체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화면에서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올라타며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이 남성은 약 두 시간 후인 5시 28분에 바퀴가 달린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모습이 엘리베이터, 로비, 주차장 카메라에 잡혔고 이후 한 시간쯤 지나 통 트기 전에 가방 없이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후는 그대로 자기 방에 들어갔구요.
호텔은 공항 근처에 있었으므로 캐리어를 끌고 오는 사람은 많았지만 보통 그 정도 크기의 짐은 방 안에 두고 다니는 게 보통이고 체크아웃할 때나 밖으로 가지고 나가죠. 왜 이 남자는 자기 짐을 체크아웃 전에 가지고 나가서 한 시간 뒤 빈손으로 돌아왔을까? 하나씩 지워나가던 용의자 명단에서 오직 이 남자 외에는 이런 의문스러운 점을 가진 사람이 없었으므로 저 가방에 피해자를 넣어서 옮겼다는 게 브레넌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문제는 가방 크기가 사람이 들어가기엔 너무 작아 보였다는 점입니다.
화면에 보이는 가방은 잘만 하면 비행기 탈 때 머리 위 선반에 넣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경찰도 이 영상을 돌려보면서 별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브레넌이 호텔의 엘리베이터와 정문의 실제 크기를 재어 본 뒤 화면 바닥에 있는 타일 크기와 남성의 신체 크기 등을 대조해 본 결과 이것은 일종의 착시였습니다. 남성이 워낙 컸기 때문에 가방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던 것이죠. 위 사진만 보면 캐리어 안에 사람이 들어가기 어려워 보이지만 피해자와 용의자가 같이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용의자의 신체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타일의 너비 등을 기준으로 캐리어의 크기를 대략적으로 계산해보니 눈에 보이는 것 보다 캐리어가 꽤 크다는 걸 밝여냈습니다. 알몸이었던 피해자가 충분히 들어갈 만한 크기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범인을 지목할 수는 없었으므로 브레넌은 더 세심하게 비디오를 관찰했습니다. 결정적인 단서는 남성이 엘리베이터에서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순간에 있었습니다. 바로 잠깐 엘리베이터 문턱에 가방의 바퀴가 걸렸을 때 남성이 두 손으로 끌어당기는 모습이었습니다.
비행기 타 보신 분은 알겠지만 수하물 규정상 넣을 수 있는 짐의 무게는 정해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항공사 기본 규정이 23킬로그램까지죠. 대한항공 국제선도 100파운드(45킬로그램)을 넘어가면 캐리어로는 안되고 따로 부쳐야 합니다. 근데 저 거구가 자기 신체 크기에 비해 작아 보이는 캐리어를 두 손으로 끌어당깁니다. 엘리베이터와 플로어 사이 그 작은 틈에 걸릴 정도면 꽤 무겁다는 소리입니다. 공항 근처 호텔에 묵는 손님이면 무슨 이민가방을 싼 것도 아닐텐데 저렇게 짐이 무겁다? 피해자 진술에서 범인이 여러 명의 백인이라고 말한 점이나 억양이 루마니아쪽이었다든가 하는 내용과는 상관없이 브레넌은 이 사람이야말로 범인이라고 확정짓습니다.
동시에 한가지 더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용의자는 너무나 침착했습니다. 차분한 모습으로 여성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고, 나갈 때도 조용히 캐리어를 끌고 주차장으로 나갔으며, 한 시간 남짓 지나서 불안해 보이는 모습 없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틀을 더 숙박한 뒤에야 호텔을 떠났습니다. 경찰일 적에 브레넌은 보통 사람이 폭행 사건을 저지를 경우 그대로 현장에서 잡히는 걸 여러번 보았습니다. 어쩔 줄 몰라서 덜덜떨거나 공황 상태에 빠져서 증거 인멸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성을 납치 강간한 후 심하게 폭행했다가 대상이 죽었다고 여겨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버려두고 나왔다면, 범행을 벌인 호텔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처럼 돌아와서 이틀을 더 지낼 수 있었을까요? 보통 사람이 범행을 저질렀다면 당장 짐 싸서 멀리 도망갔을 겁니다. 이 남자의 행동거지가 가리키는 바는 분명했습니다.
너무 능숙합니다. 분명 여러번 해 본 솜씨입니다.
2005년 11월 17일, 브레넌은 호텔 오너와 보험 조사원, 그리고 자신을 고용한 로펌의 변호사들을 다 불러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찍힌 남성의 사진을 공개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결론을 내렸냐는 질문에 브레넌은 자신이 어떻게 용의자 명단을 압축해 나갔는지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브레넌의 논리를 쉽게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피해자가 백인 여러명한테 습격당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중 하나가 말했습니다.
"이 자가 확실합니다. 제가 좀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수사할 수 있도록 협력해 주신다면 이 자를 추적해보겠습니다."
그는 이 사건이 해결되면 호텔 관계자에 의한 피해가 아니라는 게 확실하게 증명되므로 법정에서 생길 부담이 줄어들게 되어 모두가 윈윈하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우리 쪽에서 진범을 잡아서 이 끔찍한 사건을 해결한다면 평판이 어떻겠습니까? 이 자가 얼마나 침착한지 보십시오. 피해자를 강간하고 죽을만큼 때렸는데 불안하거나 겁먹은 모습은커녕 여전히 차분합니다. 여러분 중에 이런 짓을 하고도 태연자약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세요. 분명히 이번이 첫범째 범행이 아닌 게 확실합니다."
설명을 들은 호텔 관계자들 사이에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강간범을 잡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긴 했지만, 토의는 손익 계산을 최우선으로 두고 이루어졌습니다. 사회에 치부를 드러낼 것인가, 이 탐정에게 계속 돈을 지급해야 하는가 등등 말입니다. 브레넌은 고용주가 어떤 이유로 자신을 쓰든 간에 계속 일을 진행할 수만 있으면 됐습니다. 범인을 잡고 싶다는 탐정의 본능이 꿈틀거렸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브레넌이 계속 이 일을 맡아 조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고용주의 태도는 매우 회의적이었지만 브레넌은 오히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의지가 불타올랐습니다.
직원들로부터 받은 기록은 쓸모가 없었습니다. 방은 많고 직원 교대가 잦아서 고객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몇몇 스탭으로부터 거구의 안경 쓴 흑인을 봤다는 증언은 받았지만 투숙객인지 호텔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 들린 방문객인지, 투숙객을 찾아 놀러왔다가 묵고 가는 손님인지도 불분명했습니다. 투숙객이 체크인할 때 신분증을 복사해 두는 원칙이 있긴 했지만 대충대충 하다보니 이미지가 다 뭉개져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믿을 만한 자료는 비디오 뿐이었습니다. 다시 용의자가 나온 장면만 죽어라 들여다 본 결과 대부분은 쓸모 없었지만 딱 한 군데 용의자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사람을 찾아냅니다. 탄탄한 체격의 흑인이었는데 "Mercury"라는 단어가 앞에 박힌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습니다. 브레넌은 처음엔 1. 자동차 회사 머큐리, 2. 수성 3. 수은 등을 생각해봤지만 셋 다 별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용의자가 호텔에서 지내는 동안 다른 남자는 꽤 자주 호텔을 방문했으며 레스토랑 쪽 카메라에서 같이 저녁을 먹는 모습도 확인되었습니다.두 사람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이 두 사람은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 같아 보였습니다. 티셔츠를 입은 남자는 명찰 목설이를 달고 있었지만 크기가 작아서 호텔 카메라의 해상도 정도로는 글씨를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브레넌은 나사에 연락해 혹시 해상도를 올릴 방법이 없냐고 문의했지만 그런 건 SF영화에서나 가능한 기술이었습니다.
다시 비디오로 돌아와 레스토랑 장면을 면밀히 살펴본 끝에 브레넌은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살짝 뒤를 돌아볼 때 어떤 단어가 등에서 얼핏 보인 걸 발견합니다. 그는 여러번 비디오를 돌려본 끝에 이 단어가 "Verado"라는 걸 알아냅니다.
구글 검색결과 베라도는 보트의 엔진을 제작하는 회사 중 머큐리 마린이라는 곳에서 개발한 엔진의 이름이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그 해 2월, 마이애미에는 큰 보트쇼가 있었다고 합니다(그러니까 브레넌은 사건 발생 후 거의 9개월이 지나서 사건을 맡은 겁니다). 아마도 흰색 티셔츠의 남자는 머큐리 마린과 관련된 일을 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그의 떡대 친구 또한 아마 모종의 연관이 있을 겁니다.
머큐리 마린은 브런즈윅 코퍼레이션이라는 기업의 자회사입니다. 모회사는 당구와 볼링을 비롯한 여러가지 레저 용품을 취급하는 곳이며 머큐리 마린 외에도 여러 개의 보트 회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트 쇼에 그룹 차원에서 꽤 지원이 있었겠죠.
브레넌은 사건이 벌어진 호텔에 보트쇼에 참가한 직원이 머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회사의 보안 책임자 앨런 스펄링에게 전화를 걸어 수사 내용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스펄링이 확인해보니 머큐리 마린의 직원은 다른 호텔에서 머물렀다고 합니다. 전개가 바라던 대로 되지 않자 브레넌은 다시 머리를 쥐어짜냈습니다. 혹시 보트쇼에서 회사 부스를 세운 스탭들이 호텔에 있던 것은 아닐까? 이 또한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럼 그 티셔츠는 누가 입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스펄링의 회신은 2주가 걸렸습니다. 확인 결과 티셔츠는 회사 직원들이 입은 게 아니라 보트쇼 푸드코트에서 나눠주는 용도로 쓰였다는 겁니다. 음식 케이터링을 담당한 곳은 센터플레이트라는 회사로, 대형 스포츠 경기장이나 행사장에서 요리를 맡는 곳이었습니다. 미주 전 지역에 걸쳐 영업을 하는 큰 회사다보니 직원들은 전국에 흩어져서 일하고 있었구요. 센터플레이트에서는 이번 보트쇼에 200명의 직원을 썼는데 그중 일부가 그 호텔에서 숙박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센터플레이트 측에 연락을 넣어 직원 중 300파운드 가량 되는 안경 쓴 커다란 흑인이 있는지 문의하자 몇 주 후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직원들 중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해도 만난 기억이 있다는 사람이 있어서 물어보니 용의자는 뉴올리언스의 마이너리그 경기장인 제퍼 필드에서 일하기 위해 고용되었다고 합니다. 메타리라는 이제 막 뻗어나가기 시작한 작은 도시를 연고로 둔 뉴올리언스 제퍼스의 홈구장이었죠. 제대로 된 단서를 잡았구나 싶었던 브레넌이었지만 여기에 악재가 겹칩니다.
2005년 여름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 일대를 완전히 박살내버렸고 메타리 거주민들은 전부 대피해서 다른 곳으로 흩어진 상태였습니다.
허리케인이 다음 단서를 날려버리는 바람에 용의자를 확정하고 나서도 벌써 몇달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다들 사건에 손 떼고 마무리 짓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보험사 측은 그냥 피해자가 창녀였고 손님에게 맞아죽을 뻔 한 사건으로 끝내서 호텔의 책임이 없는 걸로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죠. 브레넌은 처음 일에 착수할 때부터 오로지 진실을 말하겠다고 못박았습니다.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넘긴 후 푸트 형사는 다른 사건도 맡아서 수사해야 하는 처지였으므로 자연스레 신경을 껐고 브레넌의 수사 진척에 대해선 공공연히 회의적이었습니다.
한편 브레넌의 머릿속에는 분명한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저 대단한 덩치가 자신의 범죄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태연하게 일하러 나가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면서 다음 먹잇감을 찾는 모습 말입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뉴올리언스 쪽 수사를 더디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옛 친구가 새로운 단서를 들고 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몇년 전 뉴올리언스 지역 경찰 어니스트 데마 경감(사진 왼쪽)은 탈출한 죄수를 추격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길목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휙 달려들어 앞에 가던 탈옥범에게 태클을 넣어 제압하는 걸 보게 됩니다. 당시 아이들과 휴가를 왔던 브레넌이 다급한 상황을 보고 경찰을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든 것이었죠. 데마 경감의 부하들이 오기 전까지 브레넌은 범인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들어 잡았고, 경찰은 브레넌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데마 경감은 브레넌을 가리켜 배트맨이라고 불렀습니다. 허리케인에 얻어맞아 경찰 또한 정신이 없는 상태였지만 배트맨이 부르면 데마 경감은 당연히 움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데마 경감은 휘하의 경사 몇명을 불러 다음 야구 시즌을 위해 복구중이던 제퍼 필드에 조사를 보냅니다. 브레넌은 곧 데마로부터 연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좋은 소식하고 나쁜 소식이 있어. 좋은 소식은 그 자의 이름을 알아냈다는 거야."
"나쁜 소식은?"
"이름이 마이크 존스야. 너무 흔한 이름이라 한 백만명은 있을 것 같네. 그리고 이미 일은 그만둔 지 꽤 됐고 다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대."
이름이라도 건진 게 어딥니까. 브레넌은 데마에게 감사를 전했고, 바로 호텔 투숙객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했습니다. 역시나 사건이 있던 때 마이크 존스라는 이름의 투숙객이 명단에 있었습니다. 체크인은 사건 7일 전인 2월 14일이었고 그가 캐리어를 끌고 자동차에 싣는 영상이 촬영된 후 하루가 지난 22일이 체크아웃 날짜였습니다. 결제할 때 사용한 비자 카드는 결제취소가 되었지만 기록이 남아 카드에 적힌 그의 풀네임이 마이클 리 존스(Michael Lee Jones)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주소는 그가 1년 전에 머물던 버지니아 지역을 썼고 현 주소는 남기지 않았습니다. 전화번호 또한 개인 전화가 아니라 센터플레이트의 전화번호였습니다. 여기까지는 호텔 측이 가지고 있는 자료로 알 수 있었지만 신용카드 회사로부터 직접 신상정보를 받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했고, 여전히 이 정도 증거만으로는 경찰을 움직이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수사에 불이 다시 붙은 건 사실입니다. 존스가 센터플레이트의 일자리를 그만뒀고 주변 사람들이 행적을 모른다고 해도 마이크 존스라는 인간의 다음 행동을 유추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능숙하게 사람을 가방에 넣는 솜씨로 보았을 때 이건 루틴화가 된 작업임에 분명했습니다. 존스는 요리로 먹고 사는 사람이고 센터플레이트같이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일하는 회사라면 그가 먹잇감을 찾아 사냥한 다음 장소로 떠나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알리바이도 성립하고 숙식비도 해결되는데다 월급까지 챙겨주죠. 이렇게 딱 맞는 자리를 그만둔 사람이 이만큼의 경력을 갖고서 할 행동은 무엇일까요? 브레넌은 센터플레이트로부터 비슷한 일을 하는 회사가 있는지 물어본 다음 인터넷을 뒤져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요식업계의 경쟁사 명단을 만듭니다.
또 길고 지루한 일입니다. 각 회사의 인사과에 전화를 걸어 확인한 다음 하나씩 지워나가는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계속 출장요리업체의 인사 부서에 전화를 걸고 마이크 존스가 있는지 확인하고 지워나가고 다시 전화거는 반복작업을 하던 중, 오베이션스라는 업체에 연락을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마침 본사가 같은 플로리다 주 탬파에 있었으므로 브레넌은 직접 본사를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가능하다면 직접 얼굴을 맞대고 물어보는 것이 전화보다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직접 방문한 덕분인지 브레넌은 회사 사무실에서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하던 대로 현재까지 벌인 수사 내용이 이러이러하며 오베이션스에 300파운드 이상 나가는 마이클 리 존스라는 이름의 안경 쓴 거구의 흑인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런 질문을 하면 대부분의 회사는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본 다음 그런 사람이 없다고 답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담당자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브레넌의 신분이 경찰관이 아니므로 정보를 받기 원한다면 소환장을 가져오라고 말했습니다. 브레넌은 직감적으로 여기가 맞다고 느꼈습니다.
"강간범이 여기서 일하길 원하십니까?" 브레넌이 말했지만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소환장을 받아야만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찾는 사람이 자사 직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 법적인 절차 없이 정보 제공했다가 큰일나지 않으려고 한 듯)
브레넌은 그 자리에서 마이애미 경찰에 전화를 걸어 푸트 형사에게 부탁했고 곧 회사 팩스로 소환장이 들어왔습니다. 길다란 소환장이 다 출력되기도 전에 담당자는 바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역시나 오베이션스에는 마이클 리 존스라는 이름과 체격 묘사가 완전히 일치하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현재 그는 매릴랜드 주 프레데릭이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애팔래치아 산맥 끝자락의 초봄은 따뜻한 플로리다 토박이에게는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웠습니다.
푸트 형사와 동료들이 매릴랜드의 마이너리그 야구팀 프레데릭 키즈의 홈구장 해리 그로브 스타디움에 왔을 때 마이클 리 존스는 바베큐 카운터에 서 있었습니다.
푸트 형사는 브레넌으로부터 그동안 찾아낸 것을 듣고 이 사설탐정의 끈기에 감명을 받았지만 그의 노력은 경마에서 승산이 없는 말에 전재산을 거는 것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여전히 존스가 범인이라는 주장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잠재적 용의자의 이름과 위치를 알아냈다는 것은 이 사건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죠 앨런 푸트 형사는 먼저 용의자가 있는 지역에 도착했지만 규정상 담당구역 밖으로 나가 범죄 용의자를 직접 마주해야 할 때는 항상 팀을 짜서 움직여야 했으므로 푸트 형사는 동료가 올 때 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푸트 형사는 같이 움직일 팀에 한 발 먼저 도착해서 조사를 하고 있던 켄 브레넌도 부르기로 합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처음으로 같이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약 1시간 반 정도를 운전해 존스를 직접 만나러 갔습니다.
푸트 형사는 그날 오전 중에 먼저 존스에게 연락을 넣어 지난 보트쇼 때 어떤 사건이 벌어져서 조사중인데 지금 거기서 일하고 있으면 만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존스의 목소리는 매우 예의바르고 협조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때 마이애미에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했고 자신은 오늘 야구장으로 오면 만날 수 있다며 찾아오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직접 만난 존스의 모습은 정말 컸습니다. 힘이 매우 세 보였고 키도 큰데다 옆으로도 떡 벌어져 있었으며 긴 팔과 큰 손에 허리 둘레도 굉장했습니다. 그러나 위협적인 겉모습과는 다르게 그의 태도는 온화했으며 매우 부드러운 말투에 소극적이기까지 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존스는 무테 안경을 쓰고 에이프런을 걸친 모습으로 음식 카운터 하나를 책임지는 일을 하고 있었고 부하직원들도 잘 따르며 존경받는 듯 했습니다. 그는 요리 부스를 나와 두 수사관과 함께 경기장 바깥에 위치한 피크닉 장소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마이애미에서 여성을 만난 적이 있느냐는 푸트 형사의 말에 존스는 자신이 매춘부를 부른 적은 있다고 답했습니다. 형사가 어떤 여성이었는지 묻자 "저는 백인여자하고만 섹스합니다"라고 존스는 답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에어포트 레젠시 호텔에서 그 여성과 매춘을 한 것인지 묻자 그는 아니라면서 자신이 만난 여자는 보트쇼에서 알게 됐고 다른 장소에서 섹스했다고 답했습니다. 푸트 형사는 재차 물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백인 여자와 관계를 가진 일은 없었습니까?"
"아뇨"
"외국 억양을 가진 사람은?"
존스는 자신이 성관계를 가진 여자는 독일 억양이었다고 답했습니다.
푸트 형사는 존스를 용의자로 끼워맞추기 위해 심문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이 거인은 숨기고 있는게 하나도 없다는 듯이 아주 똑 부러지게 행동했구요. 형사는 점점 여기까지 온 게 그냥 쓸데없이 시간을 버린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초저녁 공기가 플로리다 사람에게는 쌀쌀하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꼬치꼬치 캐 묻는 대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죠.
"이봐요, 그 때 강간사건이 하나 일어났는데 혹시 당신이 한 거 아닙니까?"
"아뇨, 그럴리가요!" 존스는 질문에 중격받은 듯 보였습니다. "말도 안돼."
"당신이 이 여자를 개 패듯이 두들긴 다음에 밖에 던져놓고 떠난게 아닙니까?"
"아니라니깐요"
"그럼 DNA 샘플을 제출하는 데 동의하시겠습니까?"
존스는 즉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고, 이 모습은 푸트 형사가 보기에 이 남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언제 확실한 범죄 용의자가 자기 손으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던가? 푸트 형사는 바로 동의서에 사인을 받은 다음 DNA 키트를 꺼내서 면봉으로 존스의 입안을 긁어서 샘플을 채취했습니다.
숙소로 돌아온 뒤 그는 브레넌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쟤는 아니야."
"그 새끼 맞습니다." 브레넌은 이미 며칠 전에 아들과 함께 혼자 프레데릭으로 날아와 존스와 3일 가까이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습니다. 물론 존스는 모든 것을 부정했습니다.
플로리다로 돌아오고 나서 또 몇달이 지난 어느 날, 브레넌은 경찰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푸트 형사였습니다.
"이거 믿겨지려나 모르겠네"
"뭐?"
"자네가 맞았어."
존스의 DNA는 사건 현장에서 채취한 정액과 일치했습니다.
푸트 형사는 이 떡대를 체포했습니다. 브레넌은 형사를 만나기 위해 다시 프레데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지요. 그가 사건을 맡은 지 11개월이 지난 때였습니다. 푸트 형사는 여성을 강간, 납치, 폭행한 중범죄를 저지른 죄목으로 존스를 기소했습니다. 피의자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투박한 프레데릭 경찰서의 취조실에 앉았습니다. 볼티모어 레이븐즈 티 안에는 거대한 뱃살이 늘어져 있었고 의자는 그의 몸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작아 보였습니다.
존스는 그 몸집과 큰 제스처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반복해서 모든것은 부정했습니다. 항의를 하면서도 화를 내는 모습은 없었으며 자시는 절대 어떤 상황에서도 여성에게 그런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마이애미에서 자신이 만난 여성에게 돈을 지불하고 섹스하는 과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며 때리거나 쫓아낸 적도 없다고 합니다. DNA검사 결과가 피해자의 체내에서 발견된 샘플과 일치한 것에 대해 그는 인정했지만 상대는 100달러를 지불하고 산 창녀였으며 관계 후 그녀가 떠날 때 매우 취해있기는 했어도 사지가 멀쩡한 상태였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취조 중 피투성이가 된 피해자의 당시 사진을 보여주자 "난 저 여자를 때린 적이 없어요"라며 사진을 밀어냈습니다.
"내 평생 여자를 때려 본 적이 없단 말입니다."
브레넌은 그럼 왜 체크아웃을 이틀이나 앞두고 새벽 다섯시에 캐리어를 끌고 나갔는지, 캐리어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물었습니다. 존스는 캐리어에 옷과 신발, 비디오 게임을 넣었다고 말했습니다.
"떠나는 날이 그날인지 다음날인지 헷갈렸어요. 날짜를 잘못 계산했는지도 모르죠. 썅, 이제 좀 끝냅시다."
브레넌의 마지막 유도심문은 아주 작은 질문이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나갈 때 문틈으로 캐리어가 빠질 정도로 무거워서 두 손으로 끌어당겨야 했던 이유를 말해달라고 묻자 존스는 지금 생각났다면서 캐리어에 두꺼운 책 몇 권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책을 좋아한다면서요. 그러나 브레넌이 그래서 무슨 책을 넣었는지 제목을 말해보라고 질문하자 존스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한 권도 대답하지 못했죠. 하지만 존스는 일관되게 피해자는 창녀이며 자신은 정당한 금액을 주고 성관계를 했고 폭행을 당한 것은 다른 곳에서 나중에 일어났으니 이번 사건은 자신과 관계가 없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DNA검사 결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스의 한결같이 고분고분한 태도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었습니다. 게다가 예전에 합법이 아닌 지역에서 성매매를 하려다 잡힌 기록이 있어서 오히려 그가 일관성 있게 행동했다는 증거 또한 충분했습니다.
법정에서도 그는 침착하게 자신의 주장을 견지했던 반면 피해 여성의 증언은 형편없었습니다. 여러 사진 가운데 존스의 모습을 맞춰내긴 했으나 여전히 그날 밤의 기억은 확실하지 않았고, 존스를 사건 전에도 본 적이 있긴 하다는 말을 하면서 과연 저 사람이 범인이라서 알아본건지 그냥 호텔에서 자주 마주쳐서 그런건지 불분명했습니다. 처음 했던 증언 또한 브레넌이 찾아낸 피고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에 푸트 형사마저도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존스는 2년형을 선고받습니다. 검사가 성폭행은 인정하되 다른 죄목에 대해서는 혐의가 확실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 고생을 했는데 이렇게 이야기가 끝났다는 것에 브레넌은 매우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조사 결과로 미루어 볼 때 존스는 연쇄 강간범이 분명했습니다.
"한번만 했을 리가 없습니다. 저건 괴물새끼에요. 전국을 돌아다니는 일자리를 골라 취직하는 거나 비디오에서 보이듯이 노련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도 그렇고. 필요 이상으로 차분한 것도 이상합니다. 저번에 받은 DNA를 시스템에 넣어야 합니다."
그가 말한 '시스템'은 Combined Index System, 줄여서 CODIS라고 부르는 FBI의 범죄자 DNA 데이터베이스를 가리킵니다. 미국에서 발생한 모든 범죄 현장에서 채취한 800만개 이상의 DNA 샘플 전부가 등록되어 있는 곳으로 범인이 밝혀지지 않고 미제 사건으로 끝났다 하더라도 정보는 그대로 저장해뒀다가 나중에 발생한 사건에서 채취한 DNA정보와 대조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해마다 기록이 늘어나면서 상상조차 하지 못 할 정도로 멀리 떨어진 장소와 다른 시간대에서 벌어진 사건이 사실은 같은 범인에 의한 것임을 밝히게 된 경우가 10만건을 넘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이애미 경찰은 존스의 DNA를 2006년 말 CODIS에 넣었습니다. 이 이야기 시작할 때도 말했지만 당시 기술력으로는 데이터를 처리하는데 몇 달이 걸리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미제 성폭행 사건 세 개에서 일치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 경찰의 성폭력 담당 형사 테리 드럼스튼은 오랫동안 미궁에 빠진 사건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피해자는 파란 눈의 금발 여성으로 2005년 12월 1일 처음 보는 안경쓴 거구의 흑인남성이 자신의 아파트까지 차를 태워준다기에 받아들였다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입에 재갈이 물리고 손이 묶인 채로 강간을 당하게 됩니다. 조사가 벌어지던 사이 콜로라도 쪽 피해 여성은 사건과 무관한 이유로 이미 사망했습니다. 아무런 추가 단서를 찾지 못한 채로 2년이 흐른 어느날, 갑자기 경찰 데이터베이스에 마이클 리 존스가 범인이라는 정보가 뜬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두 피해자는 뉴올리언스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 중 한 건은 2003년 5월 3일 파티를 즐기던 금발 여성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호텔로 돌아가려고 택시를 잡고 있었는데 똑같이 안경쓴 커다란 흑인 남성이 도로변에 차를 천천히 세우더니 호텔까지 태워주겠다는 말에 따라갔다가 허름한 오두막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맙니다. 범인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누른 채로 그녀를 폭행했는데, 그녀가 저항하면서 이 사이에 피부 조직이 남을 정도로 강간범의 손바닥을 물어뜯었다고 합니다. 강간 후 범인은 피해자를 오두막에 남겨둔 채 떠났고, 그녀는 바로 뉴올리언스 경찰에 신고하고 강간범의 정액을 샘플로 냈습니다. 이 사건 또한 마이클 리 존스의 범행임이 CODIS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다른 한 건의 피해자는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비슷한 내용이었습니다.
플로리다에서 받은 2년형이 끝나가던 존스는 다른 세 건의 범행이 벌어지던 문제의 시간대에 콜로라도 스프링스와 뉴올리언스에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면서 곧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법정에 불려갔습니다. 이미 콜로라도 사건의 피해자는 사망했기 때문에 지방 검사 브라이언 세실은 대신 다른 두 건에서 같은 DNA 증거가 나왔던 피해자를 '마이애미 증인'와 '뉴올리언스 증인'이라는 이름으로 소환했습니다. 세실은 이 모든 사건에서 동일한 범행의도와 계획을 보였으며 이것이 정액과 함께 존스 특유의 방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습니다.
뉴올리언스 사건의 피해자의 증언은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녀의 기억은 아주 또렷했으며 단호한 어조로 6년 전에 존스가 저지른 범행과 자신이 당한 참상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그러나 마이애미 쪽 증인은 2년 전 법정에서 검사를 혼란하게 만들던 그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처참한 영어 실력도 여전했던 탓에 존스의 변호사는 이 때를 틈타 피해자의 증언이 경찰조사와 다르다며 지적했습니다.
존스는 콜로라도 쪽 사건에 대해 모든 죄목을 부정했습니다. 그는 변호사를 통해(자신의 변호사에게도 무죄라고 말했습니다) 배심원들 앞에서 자신은 합의를 통한 섹스를 했으며 강간이 아니라 매춘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두 곳에서 똑같은 신체 특징을 지닌 범인에게 같은 패턴으로 폭행을 당한 두 사람을 다 창녀였다다고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는 소리였습니다. 세번째 사건에서는 확실이 목을 조른 흔적 또한 남아있었던데다 피해자들이 창녀라는 증거 또한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DNA라는 강력한 증거가 남아있었죠.
존스는 콜로라도의 교정시설에서 사실상 종신형을 살게 되었습니다. 폭행과 강간으로 최소 24년과 추가로 최소 12년 이상의 형량이 구형되었습니다. 가석방 공판을 받기 위해서는 깎을 수 없는 24년을 복역한 뒤인 2032년이 되어야만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2008년 당시 38세였으므로 아마 교도소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으로 짐작됩니다.
마이애미 사건의 피해자 이나 부드니츠카는 호텔과 호텔 경비업체로부터 30만달러의 보상을 받았습니다.
켄 브레넌은 마이애미에서 탐정 일을 계속 했습니다. 그는 존스를 잡아넣은 일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처음 그 자를 잡게 된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다른 사건에서 DNA 파일링을 더 광범위하게 체크하게 되면 아마 더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그의 예감은 꽤 잘 맞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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