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당시 저는 비루한 대학생의 삶을 살며 그나마 글재주가 조금 있다는 이유로 대학교 리포트를 대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규모가 작은 대학교를 다녔던 까닭에 항상 교양과목이 많은 학교의 다양한 과목이 부러웠고, 배우고 싶은 마음도 많았죠. 그래서 더 알고 싶은 욕심에 교재를 받아가며 공부해서 리포트를 써 주곤 했습니다.
2005년 연말, 지금은 독일에 계신 한 형님이 졸업연주회가 끝난 후에 부탁을 하시더군요.
"교양과목 리포트 하나만 써주라"
그 과목의 이름은
박 물 관 경 영
뭔가 심상치 않은 과목명이었지만 저는 리포트를 쓰기로 약속했고, 그 과목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리포트 주제 - 박물관 경영자로서 생각할 수 있는 박물관 수입과 관객의 증가를 위한 방법의 모색
(A4 5페이지 분량)
첫째날. 교보문고에 갔습니다. 일단 뭐라도 좀 보고 베끼면서 생각해봐야지.
모든 박물관 경영 관련서적이 다 그 과목 교수님 저서였습니다.
대체 서가 두 칸을 다 자기 책으로 채워놓다니(공동저서 포함)…이래서야 베낄 수도 없잖아!
그러나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지지는 않는 법.
이 분의 비위를 맞출 리포트를 만들어내기 생각을 알기 위해 일단 주저앉아 배가 고파질 때까지 책을 훑어봤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읽고 메모한 내용들을 정리해봤는데, 아무래도 당일치기 공부로는 리포트 하나로 1학기 점수를 결정하는 무서운 과목이 원하는 리포트를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둘째날 승부를 걸 생각으로 직접 박물관을 견학하기로 했습니다.
이 곳을 하루동안 돌아다니다 보니 리포트거리가 심심치 않게 나와서 다행이었습니다.
다음날, 이틀동안 공부한 것을 토대로 서울역사박물관 시설을 중심으로 쓴 리포트는 예상외로 재미있는 글이 되었습니다.
박물관을 이용하는 관람객은 박물관으로부터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문을 열고 들어온다. 박물관의 관람객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이 원하는 ’어떤 것‘이 준비되어있어야 한다. 과연 관람객이 원하는 ’어떤 것’들은 무엇인지, 그것을 알기 위해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직접 관람객의 입장이 되어 보았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02년 5월에 개관해 다른 박물관과 비교해 신선한 이미지가 살아있는 편이다. 흥화문 터에 건축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뒤편의 경희궁과의 조화를 생각하고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톨스토이전이 전시중에 있었으나 아쉽게도 예산의 부족으로 인해 특별전시는 들어가보지 못했다. 약 2시간 반에 걸쳐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장점 및 문제점 몇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상설전시
전시물 운용의 개선이 필요하다. ‘언제나 똑같은‘ 상설전시는 한번 찾은 관람객들이 다시 올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역사 연구는 계속된다. 그로 인해 학생 관람객들이 배우는 교과서도 바뀌고 전시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나올 수 있으므로 박물관에서는 시의적절하게 상설전시물의 이미지를 쇄신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또, 상설전시의 ‘언제나 있다’는 점 자체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해볼 만 하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박물관에서는 전통문화 체험 등의 행사는 열지만, 대부분 도자기를 만든다거나 전통놀이를 배운다거나 하는 것이 전부다. 상설전시물은 많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배울 것이 도자기 만들기와 놀이만 있는 것은 아니므로 교육프로그램의 다양화를 꾀하는 동시에 박물관 이용자들에게 박물관의 상설 전시물이 언제나 있지만 언제나 똑같은 곳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자료집, 도록
상품점에서 자료집을 사가는 사람은 주로 학생들이다. 숙제를 해가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돈과 시간을 들여 직접 찾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료집을 사지 않는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자료집에 대한 인식이 ‘숙제 참고서’ 정도로 각인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의 경우 자료집은 말 그대로 자료집으로 박물관 내 상설전시물이 거의 총망라되어있어 박물관을 가는 대신 집에서 천천히 읽어보라는 듯한 느낌이다. 비싼데다 두꺼워서 샀다가는 관람하는 내내 짐이 된다. 이런 경우 박물관의 전시물이 일상·경제·궁중·학술·예술·도시발달 등으로 나뉘어져 있으므로 자료집 또한 뭉뚱그리는 대신 책을 분리 판매하는 방법이 더 많은 이용을 촉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각 코너마다의 연계성을 도모하기 위해 각 코너에 자료집 판매기나 판매대를 설치하는 방법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하지만 판매대가 너무 많으면 지저분하게 보일 수도 있으므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상품 판매
서울역사박물관의 뮤지엄 샵은 밝은 조명과 깨끗한 인테리어로 손님을 맞았다. 비교적 넓은 공간을 차지한 이곳에서는 상품으로 수공예품과 서울관련 서적, 박물관 기념품과 특별전시물과 관련된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박물관에서만 얻을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상품이다. 그러나 박물관에서 파는 상품이 유원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라면 구매욕은 떨어진다. 박물관에서 판매하는 상품은 그 박물관의 취지와 맞아 떨어지는 내용과 희소가치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간혹 박물관 내 상품점에서 박물관 내 전시물과 전혀 상관 없는 상품을 파는 경우가 있는데(예-민속박물관에서 어린이용 장난감 판매) 깊은 생각없는 판매 행위는 당장은 수입이 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박물관의 품격을 떨어뜨려 관람객의 외면을 초래한다. 전술한 자료집이 전시물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야 하듯이 상품 또한 박물관 전체와 유기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관람객 지도- 특히 단체 어린이
관람중 아래층이 와글와글하기에 내려다봤더니 초등학생들이 단체로 관람하러 온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운 좋게도 인솔하시는 선생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이들은 경북 영주에 위치한 풍기초등학교 학생들로, 바로 옆에 있다는 경북 영주 문화원에서 기금이 남아(…) 옆건물인 풍기초등학교의 5학년 이상 학생들에게 비용을 지원, 지방문화에 대한 견학차 민속박물관과 이곳 서울역사박물관에 왔다는 것이다. 선생님께 몇까지 더 질문을 던져 보았다.
『Q-아이들을 인솔하실 때 사전 지식은 갖추고 계신가요?
A-문화원에서 준 자료들과 인터넷으로 얻은 자료를 아이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Q-아이들 관람 태도는 어떤가요?
A-뭐, 그냥 노는거죠. 말도 잘 안듣습니다. 술술 지나가면서 주마간산 식으로 보는 겁니다.』
대답에서 인솔하는 교사 자신도 ‘문화원에서 보내주니까 어영부영 놀러왔다‘는 투가 느껴졌다. 아이들 또한 말 그대로 주마간산(走馬看山)식의 관람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몇몇 어린이들은 터치스크린 등의 전시물에 관심을 느끼고 주의깊게 살펴보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이내 다른 친구들의 재촉에 다음 전시실로 끌려나갔다. 입장한지 10분여가 지나자 흥미를 못 느낀 아이들이 전시실 밖의 의자에 잔뜩 앉아있었다. 아이들에게도 몇가지를 질문해 보았다.
『Q - 여기 말고 어디를 또 갔니? / A-민속박물관이요.
Q - 거기엔 얼마나 오래 있었어? / A-한시간요.
Q - 아까 선생님 말씀이 여기 30분 있을거라고 하시던데, 30분 동안 뭘 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있니?
A - …. 그냥 열심히요.
Q - 그럼 아까 민속박물관에서는 1시간동안 뭘 봤어?
A - ….』
선생님의 말로는 사전 학습을 시켰다고는 하지만 인솔 교사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었고, 그로 인해 학생들도 인솔교사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그나마 영주 문화원에서 파견된 직원 한분이 아이들을 데리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힘들어 보였다. 그렇게 30분을 와글와글하던 어린이들은 어느샌가 사라져버렸다.
아이들은 특유의 활동성과 산만함을 가지고 있어 숙련된 인솔자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교사에게만 맡긴다는 것은 무리다. 서울역사박물관에는 자원봉사자들이 조금 거들고는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박물관(서울역사박물관 포함)에서 어린이들을 인솔하는 것은 지도교사의 몫으로 남아 있다. 어린이들은 교육받지 못한 교사 밑에서 박물관을 생각 없이 뛰어다니며 악몽같은 견학 시간을 만나고 만다. 영국의 박물관처럼 학교교육과 긴밀한 연계가 이루어져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지도로 아이들에게 박물관에서 누리는 재미를 어려서부터 느끼게 하면 그들이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박물관에 다시 찾아올 것이다.
의자 - 전시실 '밖'에 놓인 많은 의자들
박물관이 골동품 전시장에서 친근한 곳으로 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편의시설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의 경우 도시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사전계획 없이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밖에서도 걷고, 안에서도 걷다보면 빨리 지친다. 전시실 내에서 의자를 찾아본다. 그러나 의자는 없다.
겨우 찾아낸 의자 2개
사실 박물관 내에 의자는 있다. 그것도 굉장히 많다. 그러나 전시실 내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 문제. 박물관 측에서는 전시실 내 통로 확보를 위해 의자를 반입하지 않은 모양이지만 이로 인해 전시실 내에 앉아서 관람할 곳이 없어 박물관 측에서 빨리 보고 나갈 수 밖에 없는 환경을 조장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진짜로 한군데에도 전시실 내에 의자가 없나 하는 생각에 박물관 이곳 저곳을 다녀 보니, 기증유물 전시실 한 구석에 의자 2개가 있었다. 그것도 알고보니 원래 전시실이 아니었던 곳이 개조되던 중 남아있던 것이었다. 이런 식의 휴식 공간 격리+부족 현상은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도 마찬가지로, 좁은 공간 안에 많은 전시물을 배치하다보니 의자라고는 자판기 옆의 간이 의자와 고구려실, 신라실 쪽에 놓인 소파 몇 개 뿐이다.
박물관은 전시물을 배치하기 전에 전시물을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하며, 전시공간과 휴식공간을 격리시켜서는 안된다. 전시실 안에 최소한 맘 편히 감상 할 수 있는 의자 몇 개만 있어도 관람객들의 발이 한결 가뿐하게 움직일 것이다.
체험
인간은 대부분의 정보를 시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다른 감각으로부터 오는 정보, 즉 청각, 촉각, 미각 등의 오감을 같이 사용해 받아들이는 정보가 더 받아들이기 쉽고 재미도 있는 법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이런 면에서 애를 쓴 흔적이 여실히 보인다. 처음 들어가지 마지 있는 왕실 복식 입기 체험부터 시작해서 터치 뮤지엄에서 유물을 만지면 위에 있는 스크린에서 설명이 나오는 것이라든지, 도성도를 사용한 조각 맞추기, 홉, 되 등으로 곡식 계량하기, 방위 보기, 집짓기, 기와 이기 등의 다양한 학습과 유희가 혼합된 재미있는 코너들이 마련되어있었다.
몇가지 아쉬웠던 점도 있었다. 승경도 놀이의 경우 어떻게 사용하는지 설명이 전혀 없어 놀이가 불가능했으며, 조각맞추기 놀이 기구는 내장 스톱워치가 고장나 있는 등, 자료들의 파손문제가 상당했다.
체험학습이 주는 효과는 크다. 그러나 직접 손으로 만지고 돌리고 느끼다 보면 그만큼 파손과 분실의 위험도 크다. 대부분의 국·공립 박물관들은 커다란 유리벽 너머로 눈을 통해서만 유물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도 파손과 분실로 인한 자료 손실의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박물관은 자료를 보관하는 곳과 동시에 관람객이 이용하는 곳이다. 적절한 체험(예-인체의 신비전에서 간과 뇌를 만져보는 코너)는 박물관을 살아있게 하고 관람객을 즐겁게 한다.
휴식공간
박물관에서 많은 것을 보다 보면 그냥 앉아서 쉴 곳 외에도 뭔가를 마신다든지, 편히 이야기를 나눌 곳이 당연히 필요하다. 서울역사박물관에는 카페 경희궁이 있다. 그리고 그 곳이 박물관 내에서 유일하게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놀랄 수 밖에 없다. 그리 큰 박물관은 아니지만 3층에 이르는 시설에 정수기나 음수대, 심지어 음료자판기도 없다. 누구든지 목이 마르거나 입이 심심하면 독점기업(?) 카페 경희궁에서 마실 것을 사야 하는 것이다. 전술한 의자 문제에서도 나왔듯이 휴식공간은 전시공간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박물관은 간단한 자판기라도 3층에 설치해서 사람들이 다리품 파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물론 전시실 내에 음료를 쏟는다든지 하는 일도 발생할 것이지만 잘 관리하면 될 일이다.)
자료
박물관은 자료를 수집,보관,진열하고 그것을 관람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시설이다. 관람할 수 있는 시설이나 관람객이 없는 박물관은 박물관이 아니다. 또한 자료가 없는 박물관도 박물관이 아니다. ‘볼 것’이 있어야 ‘볼 사람’도 오는 법이다. 관람객만큼 중요한(어쩌면 더 중요한) 것이 박물관 소장자료라고 할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기증유물 전시실을 만들어 자료를 기증받고 있는데, ‘시민이 만들어 가는 박물관‘이라는 이미지와 귀중한 자료를 동시에 얻는 효과를 낳고 있다.
오픈한지 얼마 안된 도서실에도 어느 정도 자료가 모였으나, 아직 미숙한 점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개관한지 2년 반 남짓한 박물관으로서는 많은 관심과 노력만 있으면 충분히 자료가 모일 것으로 보인다.
‘‘젊은 박물관‘에 속하는 서울역사박물관을 통해 관람객이 원하는 여러 가지 ’어떤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 ’어떤 것‘ 들을 통해 박물관이 나가야 할 방향은 ‘죽은 박물관’에서 ‘다시 갈 만한 박물관’이 되는 것에 있다고 결론짓는 바이다.
사진자료를 7~8개씩 첨부해서 만들었는데도 요구 분량인 5장이 안되더군요. A4용지 4장 분량을 겨우 채운 정도였습니다.
뭐 그럼 어때요. A나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