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실 기사 A씨(2006년)
제가 모 고등학교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던 시절, 고등학교 행정실에는 A씨라는 유일한 남자직원이 한분 있었습니다. 저와 죽이 잘 맞는 인쇄실 기사 C씨가 "무슨 학교 직원한테 선생이라고 불러주냐"면서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낼 정도로 A씨는 아랫사람을 막 부리면서 윗사람에게는 벌벌 기는, 전형적인 강자앞에 약하고 약자앞에 강한 스타일이었지요.
사실 인쇄기사님 말씀대로 전기, 가스 등의 담당기사로 불려야 맞지만 행정실 내에서 제일 오랫동안(약20년) 근무한 덕에 그 세도가 대단했고 학교 직인도 관리하면서 각종 증명서도 담당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교양 수준이 밑바닥이라는 것(...)
오늘은 그 A씨에 대한 에피소드를 공개합니다.
1. UPS
A씨는 워드에 서투릅니다. 그래서 항상 문서를 만들때는 초안을 잡아놓고 나서 표 같은 걸 넣어야 할 때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죠. 어느날, 제 바로 뒷자리에 앉아있는 A씨가 엑셀작업을 하고 있는 저를 불렀습니다.
"이거 학교 공원화 사업 문선데 UPS에 넣어줄테니까 이거 좀 쳐라."
UPS?
국제 우편 서비스로 뭘 보내야 하나 했는데...
제 손에 들린 것은 USB메모리였습니다.
2. 유관
학교 공원화 사업 회의가 있었던 어느날, 역시나 워드가 느렸던 A씨는 서기가 되어 회의에 참석했는데, 노트북을 가지고 갔지만 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결국 손으로 회의 내용을 썼습니다.
물론 그것을 다시 문서화하는 것은 제 몫이었습니다.
군데 군데 이상한 단어들이 있어서 해석하기가 무지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때려맞춰서 쓰고 있었는데 이런 문장이 나오더군요.
「방음벽쪽 콘크리트가 유관으로 보기에…」
처음에는 유관이라길래 뭔가 오수나 지하수가 흐르는 관(流管)이라고 생각했지만
A씨는 육안(肉眼)이라는 단어를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3. 언저리 타임
토고전 다음날, 행정실은 며칠전에 돈을 걸고 스코어 맞추기 내기를 했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떠들썩했습니다.
그때 A씨의 한마디
"이천수 개X끼 언저리타임에 공을 넣을 생각을 안하고 공만 뺑뺑 돌리고 있어"
전부터 매 경기마다 이천수 선수가 나올 때마다 못한다고 욕을 했었기 때문에 이제 욕은 그저 그런가보다 했지만,
인저리 타임도 아닌 언저리 타임이라는 말은 정말 웃겨서 행정실 사람들이 다 웃어버렸습니다.
4. 집값을 올려야 한다
요즘 A씨가 사는 동원아파트라는 곳이 재개발 예정이라서 그런지, 집값 문제로 싸움이 잦은 모양입니다. 요즘 다들 그렇지만 그 동네 사람들이 담합해서 집값을 올리는 것이 거의 당연한 것처럼 되었죠. 그래서 A씨는 동원아파트 단지 내에 주민들이 뭉쳐서 집값을 올리자는 내용의 현수막을 걸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현수막에 넣을 문구를 고심하다가 초안을 내놓기는 했는데 자신이 보기에도 이상했는지 결국 저를 부르더군요. 현수막에 넣을 거니까 이것 가지고 문장 좀 잘 써보라고...
저는 과연 초안 문구가 어떻게 쓰여 있나 살펴봤습니다. 대단하더군요.
"뭉치자 동원인이여 집값을 올려야 한다"
…너무나 원색적인 문장에 한동안 할 말을 잃었습니다. 게다가 좋은 일도 아니고 지역 이기주의에 따라 우리 잘 먹고 잘살게 담합하자는 문장을 쓰라고 하는 것이 싫어서 그냥 저는 하던 일을 계속 했죠.
하지만 뭘 어쩌겠습니까. 공익근무요원이 무슨 힘이 있다고… 잠시 뒤에(진짜로 A씨 자리가 뒷쪽에 있기도 하지만) 독촉하는 서슬에 결국 대충 "동원의 발전과 이익 하나되면 지킬수 있다"라고 써서 드렸습니다.